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항 석유 발견 사건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경상북도 포항 지역은 예전부터 석유 부존 가능성이 제기되던 곳이었고 이미 1964년에 정OO씨가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 및 국립지질조사소에서 합동으로 시추한 적이 있었다. 이때에도 천연가스는 소량 발견되었지만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이 내려져서 중단되었다. 이전부터 포항 지역이 지목된 근거는 다음의 2가지였다. 1. [[삼국유사]]에 [[경주시|경주]] 일대에서 사흘 동안이나 불길이 솟았다는 기록이 있다. 1. 지질 조사 결과 포항 지역이 [[신생대]] 제3기층[*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퇴적층 지형이다.]으로 구성되어 있었다.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. 1. 삼국유사 기록이 진실이라는 근거는 없다.[* 삼국유사 자체가 관찬사서 [[삼국사기]]에서 빠진 많은 기록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[[곰]]이 [[마늘]]과 [[쑥]]을 먹고 사람으로 변한다는 [[단군신화]]의 내용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[[설화]]적 기록도 가감없이 실었기 때문에 사실로서의 역사를 연구한다면 문구 그대로 100% 받아들이면 안 되는 부분이 많다. 즉 불길이 솟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[[불의 정원|가스불 분출]]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면 단군설화에도 적용하듯이 다른 사건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기사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. 물론 삼국사기 등 다른 전근대 사서도 다소 설화적인 내용이나 윤색된 티가 나는 기록을 종종 싣기는 했지만 삼국유사는 편찬 목적과 특성상 특히 많은 편이다.] 1. 해당 지층이 3기층이기는 하나 퇴적층이 너무 얇고 화강암 위주이다. 이후 정OO씨의 형이었던 또다른 정OO씨는 정치권[* 주로 [[김종필]] 국무총리를 대상으로 석유 부존 가능성을 역설했다고 한다.]을 대상으로 치열한 로비를 벌였고 결국 이러한 논의는 대통령 [[박정희]]에게까지 보고가 이루어졌다.[* 사실 이때 민간인 정씨 형제의 주장과 그 뒤로 포항 석유 탐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[[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]]과 유사한 모습이 보인다. 정부와 전문가들이 과학적 증거를 들어 아니라고 해도 일부 민간인들이 고집을 피우면서 조사를 계속할 것을 주장하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.] 당시는 1974년 1차 [[석유 파동]]으로 인해 물가상승률이 20%대로 치솟을 정도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[[박정희]]는 "석유가 있을지도 모른다"는 말을 듣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. 수많은 지질 관계 전문가들이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반대했음에도 박정희는 [[희망고문|"'''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주었을 것이다.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디엔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.'''"]]라고 말하며 정부 주도로 석유 시추를 하도록 명령했다. 이에 따라 1975년에 또다시 포항 영일만 일대 지역에서 석유 시추가 재개되었다. 1975년 비밀리에 시작된 포항 석유 시추는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[[중앙정보부]]가 맡아서 'OO산업공사'라는 위장 회사의 명칭으로 진행하였고 앞서 언급한 형 정OO씨가 참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실제로는 시추 현장에서 형 정OO씨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고 전해진다. 갑자기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한국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. 당시는 군부독재 정권이었고 특히 [[10월 유신]]으로 박정희가 종신집권 체제를 완성한 직후였으며 중앙정보부는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절대권력자인 박정희의 지시 아래 [[비변사|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하던 무소불위의 기관]]이었다. 심지어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서 한때 [[양지 축구단]]도 직접 운영했을 정도로 당시 정보부는 안 끼는 데가 없었다.[* [[북한]]이 [[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/북한 vs 이탈리아|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이란 놀라운 성과를 거두자]] 무조건 북한보다 더나은 성과를 거두겠다는 목표로 [[김형욱]] 정보부장이 창설하였다.] 이런 이유로 막대한 자금과 보안이 필요한 석유 탐사도 중앙정보부가 직접 맡게 된 것이다. 또 한국의 유일한 석유개발 국가기관인 [[한국석유공사]]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1979년에서야 설립되었기에 딱히 탐사현장 운영을 맡길 다른 기관도 없던 시절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